존 오브 갠트 :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불씨를 당긴 랭커스터 가문의 실력자 완벽 정리

존 오브 갠트: 1381년 여름, 런던을 붉게 물들인 불길의 중심

우리 코리스토리 독자님들, 1381년 여름 잉글랜드의 밤하늘이 시뻘건 불길로 뒤덮였던 날을 상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당시 잉글랜드 전역을 휩쓴 농민 반란, 이른바 왓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분노한 민중들이 런던으로 진격해 가장 먼저 부수고 불태운 곳은 국왕의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템즈강 변에 자리 잡고 있던 화려함의 극치, 사보이 궁전이었죠.

농민들은 궁전 안에 있던 수많은 금은보화와 값비싼 태피스트리를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하고 강물에 던져버렸어요. 도대체 이 궁전의 주인이 누구였길래 이토록 엄청난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걸까요? 그 주인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깊이 알아볼 인물,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실력자이자 가장 미움받던 권력자 존 오브 갠트입니다. 영국 왕실의 족보를 완전히 뒤바꾸고, 훗날 잉글랜드 전역을 피로 물들인 장미전쟁의 근본적인 씨앗을 뿌린 이 복잡하고 매력적인 인물의 삶 속으로 저와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플랜태저넷의 셋째 아들, 거대한 부를 거머쥐다

존 오브 갠트는 1340년 플랑드르의 헨트(Ghent)에서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사람들은 헨트라는 발음을 잘하지 못해서 그를 갠트의 존, 즉 존 오브 갠트라고 불렀죠. 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아주 묘한 위치입니다. 엄청난 특권과 명예를 누리지만,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왕좌에 오를 확률은 희박하기 때문이에요. 그의 위로는 잉글랜드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흑태자 에드워드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의 첫 번째 전환점은 바로 랭커스터의 블랜치와의 결혼이었습니다. 블랜치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거대한 영지와 부를 자랑하는 랭커스터 공작의 상속녀였어요. 안타깝게도 블랜치의 아버지와 언니가 흑사병으로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존 오브 갠트는 젊은 나이에 아내의 막대한 유산을 모두 물려받게 됩니다. 이때 그가 상속받은 영지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에 걸쳐 있었고, 그는 하루아침에 국왕인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잉글랜드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길 랭커스터 가문이 본격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랍니다.


백년전쟁의 수렁과 스페인의 왕관을 향한 야망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아내 블랜치 역시 흑사병을 피하지 못하고 1368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슬픔에 빠져있을 틈도 없이 그는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으로 내던져졌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길고 지루한 백년전쟁을 치르고 있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군의 든든한 사령관이었던 형 흑태자 에드워드가 심각한 병에 걸려 전선을 이탈하게 됩니다.

결국 존 오브 갠트가 형을 대신해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와 카스티야(현재의 스페인) 전선으로 향해야만 했습니다. 군사적 재능은 형인 흑태자만큼 뛰어나지 못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이 될 카스티야의 콘스탄스를 만나게 됩니다. 콘스탄스는 카스티야의 전 국왕 잔혹왕 페드로의 딸이었습니다. 존 오브 갠트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카스티야의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죠. 비록 잉글랜드의 왕이 될 수는 없었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거대한 왕국을 다스리는 국왕이 되려는 강렬한 야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이토록 방대한 역사 자료를 찾아보고 글을 정리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도 평생 조카와 형의 그늘에 가려 잉글랜드의 왕좌에 오르지 못했던 그의 진짜 속마음은 어땠을까요. 후대에는 야망에 가득 찬 섭정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복잡한 궁중 암투와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가문을 지키기 위해 매 순간 뼈를 깎는 고민을 했을 한 사람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어쩌면 그가 원했던 것은 절대적인 권력보다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는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하는 씁쓸함도 남네요.


조카를 지키는 방패인가, 권력을 탐하는 늑대인가

1377년, 잉글랜드에 거대한 슬픔이 찾아옵니다. 위대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영웅 흑태자 에드워드가 연이어 세상을 떠난 것이죠. 왕위는 흑태자의 어린 아들, 즉 존 오브 갠트의 조카인 리처드 2세에게 넘어갔습니다. 당시 리처드 2세의 나이는 고작 10살이었어요.

자연스럽게 숙부이자 잉글랜드 최고의 실력자인 그가 실질적인 섭정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그의 평판은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지속되는 백년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전비가 필요했고, 그는 인두세라는 무거운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과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줄어들어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들었던 백성들에게 이 세금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죠. 그 결과 앞서 서두에서 말씀드린 왓 타일러의 난이 폭발했고, 그의 상징이었던 사보이 궁전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평생토록 리처드 2세의 왕위를 넘보지 않았고, 오히려 흔들리는 왕권을 지켜주는 강력한 방패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왕의 숙부로서, 그리고 랭커스터 가문의 수장으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선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죠.

💡 한 줄 팁: 영국 런던으로 여행을 가시게 된다면 화려한 사보이 호텔 주변을 한번 걸어보세요. 그곳이 바로 왓 타일러의 난 때 불타버린 존 오브 갠트의 웅장한 사보이 궁전이 있던 역사적인 장소랍니다.


중세 유럽을 흔든 세기의 로맨스, 캐서린 스윈포드

존 오브 갠트의 삶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흥미롭고 극적인 이야기는 바로 그의 세 번째 부인, 캐서린 스윈포드와의 로맨스입니다. 그녀는 원래 그의 첫 번째 아내 블랜치 시절부터 랭커스터 가문의 자녀들을 돌보던 가정교사였습니다. 신분은 낮았지만 지적이고 매력적이었던 그녀에게 존은 깊이 빠져들었고, 두 번째 아내 콘스탄스가 살아있던 시절부터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연인 관계로 지내며 네 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보퍼트라는 성이 주어졌어요. 중세 시대에 귀족과 하녀 다름없는 신분의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은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존 오브 갠트는 이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했고,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며 정성껏 키웠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두 번째 아내 콘스탄스가 세상을 떠나자, 그가 주변 귀족들의 엄청난 반대와 조롱을 무릅쓰고 캐서린 스윈포드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교황청과 조카 리처드 2세를 움직여 보퍼트 가문의 아이들을 적자로 인정받는 공식 문서까지 받아냈죠. 단,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보퍼트 가문의 후손들은 영원히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조항이었어요.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란 참으로 묘합니다. 훗날 장미전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끝난 후,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튜더 왕조를 열고 왕관을 쓴 헨리 7세가 바로 이 보퍼트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 신분을 뛰어넘었던 그의 선택이 결국 새로운 잉글랜드의 역사를 창조해 낸 셈입니다.


문화와 사상의 든든한 후원자

존 오브 갠트는 단순히 정치와 전쟁에만 몰두했던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중세 잉글랜드의 문화와 사상적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는 존 위클리프입니다.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의 영어 번역을 주장했던 위클리프는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어요.

하지만 존 오브 갠트가 권력을 이용해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인 로라드파를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었습니다. 비록 그의 동기는 교회의 권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있었지만, 이로 인해 잉글랜드에 자유로운 사상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영국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서 역시 그의 든든한 후원을 받았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제프리 초서의 아내인 필리파 로에트가 바로 캐서린 스윈포드의 친언니였다는 점이에요. 즉 존 오브 갠트와 제프리 초서는 동서지간이었던 셈이죠. 이러한 끈끈한 관계 덕분에 초서는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며 불후의 명작 캔터베리 이야기 같은 위대한 문학 작품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랭커스터 가문과 왕위 계승의 핵심 요약

복잡한 중세 왕실의 계보와 사건들을 우리 독자님들이 한눈에 파악하시기 쉽게 표로 정리해 드릴게요.

구분주요 인물 및 내용역사적 의미 및 결과
첫 번째 결혼랭커스터의 블랜치 (Blanche of Lancaster)막대한 영지 상속, 아들 헨리 볼링브로크(훗날 헨리 4세) 탄생
두 번째 결혼카스티야의 콘스탄스 (Constance of Castile)카스티야 왕위 요구권 획득, 이베리아 반도 외교전 참여
세 번째 결혼캐서린 스윈포드 (Katherine Swynford)세기의 로맨스, 보퍼트 가문 탄생 (튜더 왕조의 뿌리가 됨)
종교/문화존 위클리프, 제프리 초서 후원영문학의 발전 및 잉글랜드 초기 종교 개혁의 방패 역할
주요 위기1381년 왓 타일러의 난농민 반란으로 런던 사보이 궁전 전소, 민중의 거센 저항 직면

중세 유럽의 권력 구조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잉글랜드 왕실 내부만 봐서는 부족했어요.
당시 유럽은 오늘날처럼 각 나라가 또렷하게 구분된 세계가 아니라, 왕권·귀족·교회·제국 권위가 복잡하게 겹쳐 있던 질서 속에 놓여 있었거든요.

특히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잉글랜드 왕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유럽의 정통 권위’를 주장해 왔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로마 제국의 후계자이자 기독교 세계의 보편적 통치자라는 상징을 내세웠고,
잉글랜드 왕들은 점차 자국 중심의 강한 왕권과 세습 정당성을 앞세우며 독자적인 권력 체계를 구축해 나갔어요.

중세 유럽의 지배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영국 왕권의 충돌과 진화

이 두 흐름은 직접적인 전쟁만으로 충돌한 것이 아니라,
혼인 동맹·왕위 계승·교황과의 관계·대륙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수세기에 걸쳐 긴장과 변화를 반복했습니다.
결국 중세 후기로 갈수록 유럽의 권력 질서는 “보편 제국”의 이상에서 “국가 중심 왕권”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바로 플랜태저넷 왕가와 랭커스터 가문 같은 인물들과 혈통이 놓여 있었던 것이죠.


코리의 생각 정리

존 오브 갠트는 1399년, 파란만장했던 59년의 생을 마감하고 레스터 성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조카 리처드 2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거대한 영지를 몰수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에 분노한 존의 장남 헨리 볼링브로크는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4세로 즉위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랭커스터 왕조의 시작입니다.

결과적으로 존 오브 갠트 본인은 결코 왕관을 쓰지 못했지만,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4세, 5세, 6세는 물론이고 훗날 장미전쟁을 끝낸 튜더 왕조의 헨리 7세까지 모두 그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이었습니다. 현대의 영국 왕실인 윈저 가문 역시 그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존 오브 갠트와 만나게 됩니다.

당대에는 비판받는 섭정이자 오만한 귀족으로 여겨졌을지 모르지만, 역사라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결국 모든 잉글랜드 왕들의 아버지가 된 진정한 최후의 승리자였습니다. 역사의 이면에는 늘 이렇게 흥미로운 인물들의 복잡한 욕망과 선택이 얽혀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도 코리스토리에서는 더욱 흥미진진하고 깊이 있는 세계사 이야기로 독자님들을 찾아오겠습니다!


[참고자료]

  • Dan Jones, The Plantagenets: The Warrior Kings and Queens Who Made England
  • Helen Castor, Blood and Roses: One Family’s Struggle and Triumph During the Tumultuous Wars of the Roses
  • Alison Weir, Katherine Swynford: The Story of John of Gaunt and his Scandalous Duchess
  •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및 잉글리시 헤리티지 역사 보관소 교차 검증 자료
  • Encyclopedia Britannica | Britannica

자주 묻는 질문 (Q&A)

Q1. 존 오브 갠트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A1. 그가 태어난 장소인 플랑드르 지역의 헨트(Ghent)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당시 잉글랜드인들이 헨트의 발음을 갠트(Gaunt)로 표기하면서, 갠트 출신의 존이라는 뜻의 존 오브 갠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Q2. 왜 그는 잉글랜드 최고의 권력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않았나요?

A2. 당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법칙에 따라, 그의 큰형인 흑태자 에드워드의 혈통이 우선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흑태자가 일찍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는 흑태자의 어린 아들인 리처드 2세에게 정당하게 계승되었고, 존은 섭정으로서 조카의 왕위를 끝까지 찬탈하지 않고 보호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Q3. 그와 장미전쟁은 어떤 관련이 있나요?

A3. 장미전쟁은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내전입니다. 여기서 랭커스터 가문이 바로 존 오브 갠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블랜치 사이에서 파생된 가문입니다. 또한 장미전쟁을 종식시킨 튜더 왕조의 헨리 7세 역시 존과 세 번째 부인 캐서린 스윈포드 사이에서 태어난 보퍼트 가문의 혈통입니다. 결국 그의 핏줄에서 장미전쟁의 시작과 끝이 모두 이루어진 셈입니다.


존 오브 갠트 중세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문의 창시자 존 오브 갠트의 고풍스러운 역사적 초상화
존 오브 갠트 잉글랜드의 왕관을 쓰지는 못했지만 훗날 모든 잉글랜드 국왕의 조상이 된 존 오브 갠트

#존오브갠트 #랭커스터가문 #영국역사 #중세유럽사 #장미전쟁 #백년전쟁 #코리스토리 #플랜태저넷 #역사공부 #세계사


👉 같이 읽어보세요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글도 함께 읽어보세요.
같은 주제를 조금 더 넓고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헨리 7세와 튜더 왕조의 탄생: 장미 전쟁의 종결과 근대 영국 국가 기틀 확립의 역사

백년전쟁의 서막: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의 왕위 계승 전쟁 분석

에드워드 3세 백년전쟁의 서막을 연 왕

과거를 알면 오늘이 더 따뜻해져요.
다음 이야기에서도 천천히 걸어요 — KoriStory

댓글 남기기

광고 차단 알림

광고 클릭 제한을 초과하여 광고가 차단되었습니다.

단시간에 반복적인 광고 클릭은 시스템에 의해 감지되며, IP가 수집되어 사이트 관리자가 확인 가능합니다.